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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픽: 시간 끝에

팬픽: 시간 끝에

-이 소설은 일개 유저의 머릿속에서 나온 내용입니다.

-정식 설정이 아닙니다

-개연성이나 여러 면에서 흠이 있을 수 있습니다

-퀘스트 남겨진 바람의 절벽의 전체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늦게 기입하여 죄송합니다




#0

그 날도 세상엔 해가 떴다.  

어딘가의 누군가는 행복했고, 가혹했거나 아니면 평범하게 바빴고, 

그러다 낙엽 지듯 저물어 새싹 움트듯 다시 태어났다. 

아무 특별할 것 없는 하루였다.

어느 에스더의 이름을 붙인 여관에서 마을 사람들을 돌보는 한 사제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있다가 피가 완전히 멎으면 그 때 약을 바를게요.”

“감사합니다. 사제님.”

사제는 묵묵히 인사하며 아랫층으로 내려왔다. 한창 여관을 청소하던 주인이 사제를 보며 인사했다. 


“사제님. 많이 힘드시죠. 잠시 쉬었다 하세요.”

“아니에요. 다치신 분들이 걱정이죠. 그건 그렇고…”  

여관 곳곳의 비어있는 책상이며 선반들을 둘러보는 사제의 표정이 침울해졌다. 

“걱정이네요. 이대로 가다간….”


여관 주인의 표정 역시 말없이 같아졌다.

사교들의 행패로 다쳐오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이 시기에 치유 물약 같은 의약품이 너무 부족했다. 

하물며 깨끗한 물조차 요즘은 약간씩 형편에 찼다.


“제가 조금만 더….”

조금만 빛이 있었더라면. 지난 세월 동안 조금이라도 더. 다친 사람들을 낫게 해 줄 빛이 내 안에 있었더라면. 

그런 생각들에 사제는 견딜 수 없었다.   


“그런 말씀은 마시고요. 괜찮습니다”

죄책감 섞인 한탄이 더 계속되지 않도록 단호하게 끊어냈다. 


매일 힘들게 사람들을 돌보는 분이 빠져도 될 마음의 늪이 아니었다. 

하물며 사제라 한들, 마르지 않는 우물도 아니었다.  

최근에는 그냥 다친 게 아닌 기이한 광증으로 실려오는 마을 사람들도 있어서 더더욱 그랬다.

약물이나 주술 때문인 것도 아닌 것 같다는데 결국 사교에서 정체 모를 무언가를 한 것 같다는 듯 했다. 


빌어먹을 슈헤리트 놈 때문에 사교 같은 게 깽판을 치게 된 걸 생각하면 갈리는 이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병 주고 약 주자는 건지 아니면 화가 있으면 복도 있다는 건지 

최근에 슈헤리트가 죽었다는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괜찮아질 겁니다. 실리안 폐하께서 돌아오셨으니 이제 곧…”

“사제님!”

고통 섞여 사제를 부르는 비명소리와 함께 우당탕하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당황하여 돌아보니 누군가가 미친듯이 몸부림치며 계단을 뒹굴고 있었다.


“아뿔싸!”

평범하게 다친 게 아니라 제정신을 놓은 듯 횡설수설하며 웃기만 하는 기이한 광증. 

그 중에 한둘은 단순한 실성이 아닌 난폭한 행동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게 사제가 제 신성력을 모두에게 향하지 못한 이유였다.

하지만 신성력을 받고나면 그런 행동은 없어져서 다행이다 했는데 갑자기 왜…


“위험합니다! 피하세요!”

같잖은 생각을 할 틈은 없었다. 널브러진 몸을 일으킨 누군가가 다시 괴성을 지르며 사제에게로 달려들었다.

사제는 저에게로 달려드는 모습을 보면서도 얼어붙은 듯 여관 현관을 뒤로 한 채 그저 서있었다. 

뒤늦게 뛰어든 몇몇의 사람들은 벌어질 유혈사태를 각오하며 의미 없는 후회만을 했다.

그렇게 될 줄 알았다.


“…어라?”

난데없이 펼쳐진 눈 앞의 광경에 다들 놀라거나 의아하기 전에 넋이 나가 뛰어들던 그대로 멈춰 섰다.


“괜찮으십니까”

푸른 달걀껍질 같은 벽이 사제와 제 키만한 지팡이를 든 어떤 남자를 감싸고 있었다. 

사제는 대답도 못한 채 쳐다보기만 했다. 

남자와 그의 지팡이를. 옷에 수 놓인 루페온의 십자가를. 그리고….


쾅쾅! 쾅쾅쾅! 쾅쾅쾅쾅! 쾅쾅쾅! 

정신없이…아니 마치 어떤 노래의 가사라도 되는 양 괴이하게 두드려지는 벽 바깥의 주먹질을 향해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남자의 손에서 빛이 흘렀다. 

그에 잠겨 들듯, 날뛰던 마을사람은 괴성이며 벽을 두드리던 행동도 모두 멈추고 잠이 들었다.     

쓰러진 인영과 함께 푸른 벽도 사라졌다. 남자는 자신을 쳐다보는 모두를 향해 인사했다.


“빛의 길을 걷고자 이 곳에 미천한 몸을 향한 사제 아만이라고 합니다”

“사제…님이라 하셨소?”

“예. 이젠 걱정하지 마십시오. 괜찮습니다.”

아까 자신이 했던 말을 돌려받은 여관주인의 표정은 기쁜 듯 아닌 듯 복잡했다.


아만이라 자신을 소개한 사제는 쓰러진 사람을 돌보고 있는,

지금까지 짧다면 짧은 시간동안 홀로 여관에서 애써왔던 다른 사제에게로 한쪽 무릎을 끓고 손을 향했다. 

          

“성함을 여쭤도 되겠습니까”


그 날도 세상은 해가 졌다

어딘지 모를 곳에서 불어온 바람에 낙엽 하나가 떨어졌고, 몇 번째인지 모를 물방울 하나가 바위 귀퉁이를 살짝 깎아내고, 

있는지 없는지도 안보이는 작은 고드름 하나가 깨져 떨어진 아무 특별할 것이 없던 하루였다.

하지만 어느 에스더의 이름이 붙은 여관에서 세이크리아로 순례여행을 가던 도중 마을사람들을 돌봐왔던  어떤 여사제에게는 더 이상 아니었다


그녀는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제 이름은…”



#1

살다 보면 가끔 그런 순간들이 있다.

너무 식탁 가까이 나무컵을 뒀다가 의자에서 일어날 때 엎어버리고

그 쏟아진 물을 닦다가 원래 나가려던 시간보다 좀 늦어진 나머지 약속에 늦지 않으려고 서둘러 달리다가 

넘어져서 발을 심하게 삐어 버리는.


그리고 그렇게 가게 된 곳에서 

“너는 사제가 되면 좋을 것 같다”는 말을 듣게 되는.


하지만 세리아는 그렇게 기적처럼 이어졌던 옛날의 찰나들을 단 한번도 유난스레 의식해본 적은 없었다.

그렇게 여겼다.

마치 일기장을 쓰는 누군가가 표지에 유난스레 관심 갖진 않는 것 처럼.

어쩌다 사제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 보다 그저 사제가 되고 싶었으며, 사제가 된 후에는 앞으로 해 나갈 일들이 중요하다고.


그런데…지금 그 모든 순간들이 다시 떠오르는 건 어째서지.

마치 그 때처럼 속절없이 어긋나게 굴러들어오고 있는 지금의 현실 앞에서.

떠나버린 광기 대신 벼락이 비와 내리며, 바람이 함께 감아 내리는 이 순간에.


세리아는 빗물에 뿌여지는 눈을 겨우 바로뜨며 아만 사제님을 보았다

“빨리 사람들을 찾아야 해요!”

아만 사제님은 마주 고개를 끄덕이며 내달렸다 


무사해야 할 텐데.

아무리 한순간에 등 돌려 외면당하며 조롱 받고 멸시 들어도,

지금 저렇게 말없이 앞서 달리는 저 분이 누구보다 절실히 기원하리라.

무사하라고. 다들 무사하라고.


몸은 정신없이 뒤따르는데도 마음은 물에 던진 돌처럼 속절없이 잠겨들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재앙처럼 밀려들던 악마들이 사라졌으니까 이젠 괜찮아야 맞는 게 아니었나

이제 더 이상 사교도는 없으니까 모두 행복해진 게 아니었나.

그런 사람들을 바라보며 기사님도, 아만 사제님도, 함께 기뻐야 하지 않았나.


그런데 왜 이렇게 된거지.

어째서 다른 누구도 아닌 세이크리아의 사제들이 영지의 모두를 사교도라 말하고

다들 이런 곳으로 도망쳐야 했고

아만 사제님. 저희는…우리는, 왜 이렇게 와야 했나요.

당신은…당신은….


“도망칠 곳은 없다!”

빗소리에도 다 가려지지 않는 성난 외침에 상념은 가시고 현실만이 남았다.

마치 짐승이라도 꿰려는 듯 화살들이 땅 이곳저곳에 박히며 부서졌다. 

부질없는 비명소리와 엄마를 찾는 울음소리가 귀를 찌를 듯 박혀왔다.  


그리고 웅크려 고개조차 들지 못한 채 발에 불똥이라도 떨어진 듯 제자리서 뒤뚱거리기만 하는 그들은

짐승이 아닌 사람이었다    

전부 사람, 사람, 사람들이었다.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세리아는 그만 정신을 잃을 듯 했다.

아만은 황급히 지팡이를 바로쥐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어서 도망치세요! 사제들은 제가 막겠습니다!”

아만이 일으킨 거센 황금빛 힘이 폭발해 사제들을 쓰러뜨렸다. 

나동그라진 사제들을 뒤로 하며 세리아는 외쳤다

“저를 따라오세요!”


#2

그저 화살 앞에 속수무책이었던 사람들과 세리아는 다 함께 절벽위로 뛰었다.

너나할 것 없이 한 가지 소원만으로 여념없었다. 

어디라도. 

방금 전 그 곳만 아니라면 세상 그 어느 곳이라도. 

다시 쫒아오기 전에 제발 앞으로, 위로.


그렇게 미친듯 달려가던 그들의 눈 앞에 사람들이 보였다. 사람이 있었다. 

그들 중 누구라도 기쁨에 못 이겨 소리지르려 했다. 

살려 달라고, 여기에 있다고, 구해달라고. 


하지만 목 바깥까지 나오려던 환희의 탄성은 모래시계라도 뒤집은 듯 절망이 되어 감쪽같이 사라졌다.


사람이 있었다. 화살을 쏘아대는 세이크리아의 사제들이 있었다. 

비명을 지르며 도와달라 외치며 발버둥치는 사람들이 보였다. 

여기까지 죽어라 왔던 그들의 소원이 짓밟힌 것처럼 세상은 방금 전으로 거꾸러져 있었다.

         

모두가 다시 움직이거나 소리 지르지도 못하고 멈춰버린 그 때, 세리아의 머릿속에선 갑자기 아만 사제와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그 날 기이한 광증을 보였던 마을 사람이 후려쳤던 주먹질의 기억이 되새김질됐다.


쾅쾅! 쾅쾅쾅! 쾅쾅쾅쾅! 쾅쾅쾅!


마구잡이로 때렸다기엔 꼭 어떤 노래의 가사라도 되는 것처럼 일정하고 괴이하게 두드려서 이상하게 잊기 힘들었다던 여관 주인님의 느낌.

그 느낌을 이제는 알 것 같았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숨바…꼭질…


꼭꼭~숨어라~  절벽위에 숨어라~

기사님 어디 계세요, 왜 저희에게 와주지 않으세요… 


꼭꼭 숨어라~ 꼼짝 말고 숨어라~

저에게…아만 사제님에게…아만…사제님.


깔깔 깔깔깔~ 깔깔깔깔 깔깔깔~

“여러분! 절 따라오세요! 어서 따라오세요! 달리세요 어서!” 


후들거리던 일행이 화들짝 놀라 화살을 쏘는 사제들을 피해 달음박질쳤다. 

도망치는 그들을 향해 화살 몇 대가 날아들었다. 

옆으로 쏘아지는 화살에 몇몇이 기겁해 넘어지고 쓰러지려는 걸 세리아가 일으켜 세워주며 소리쳤다 


“아만 사제님이 계세요! 그 분을 믿으세요! 구해주실 거예요! 달리세요! 계속!” 


이제 일행은 새로운 소원 아래 하나 되어 다시 위로 향했다. 

조금만 더.

언제 올 지도 모를 구원을 위해 이 순간만이 영원하라고.

정처없이 뛰고 뛸 뿐인 우리를 딱 잘라서 쳇바퀴처럼 돌려달라고.


그렇게 계속 향하던 눈앞에 또다시 광경이 있었다. 아까처럼 물건들이 보였다.


이번엔 아무도 철없이 기뻐하지 않았다. 경솔하게 소리치려 하지 않았다. 

환희에 가득 차 구해달라 외치려 하지 않았다. 

그저 숨 멎은 채 멈춰 섰다.


화살이 있었다. 

사제들이 쏘아대는 세이크리아의 화살들이 있었다. 

사람들이 질러대며 도와달라 외쳐대는 비명과 발버둥이 보였다. 

또다시 세상이 조롱하듯 그들의 소원은 부서진 쳇바퀴마냥 산산히 조각나있었다.


기이하게 땅에만 박혀대며 짐승몰이라도 하듯이 허공만 날아가는 화살, 화살, 화살들은

마치 어린애가 서툴게 연필통에 던져대는 연필처럼 계속 부서져 나갔다. 

그 광경에 조금이라도 정신을 놓으면 왜 저 사람들은 떨어져 있는 걸 줍지 않을까? 어서 대신 주우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것만 같았다.  


다행이도, 혹은 슬프게도 그리 되지 못한 보레아의 영지민 일행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들의 사제, 알고보니 데런이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한순간에 벌레보다 못하게 외면당하며 갖은 조롱과 경멸을 온몸으로 받아야 했던 그들의 사제님은 지금 여기 없다고.


저 뒤에서 악마들처럼 바글댈 사제들의 무리를 헤쳐가며 자신들의 눈앞에서, 지금 눈앞의 사람들에게로 쏟아지고 있는 저 화살들을 막아주지 못할 거라고.


자, 빗 속에서도 가려지지 못한 진실을 두 눈 똑똑히 뜨고 보라고.

이게 바로 한순간의 미혹에 휘둘려 너희들의 빛을 저버린 한 영지의 짐승같았던 선택이 받아야 할 신이 내린 응보라고.

    

그 잔인한 속삭임에 더는 견디지 못해 일행 중 가장 어렸던 한 아이가 미친듯이 활을 당겨대는 세이크리아의 사제들에게 덤벼들려 했다.

그런 그를 세리아가 끌고서 소리쳤다.


“여러분! 멈추지 말고 가세요! 어서 절벽으로 가세요! 어서!”

그렇게 향해가는 사제를 따라 일행들도 빗발치는 화살 사이로 어쩌면 마지막이 될 지 모를 도망을 쳤다.

벗어나려 버르적거리는 아이의 손을 세리아는 어떻게든 놓지 않으려 붙잡았다.

 

그것만이 그녀가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저들을 구해줄 수 없는 무력한 사제는 그저 제가 지켜야 할 사람들을 위해 도망칠 뿐이었다. 


조금만 빛이 있었더라면...지난 세월동안 조금이라도 더. 

사람들에게 쏟아지는 화살을 막아줄 수 있는 빛이 내게 있었더라면, 

그런 생각에 사제는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의미 없었다. 지금 이 순간이 매정하게 똑똑히 말해주고 있었다. 

쓸모없다고. 땅에 부서져 조각난 화살대만 못하다고.

지금 하는 같잖은 후회며 알량하게 상처나 감싸주는 빛 따위와 걸었던 지난 세월에 아만 사제님처럼 되겠다고 꿈꾸었던 주제 모르는 희망까지도.

하물며 사제가 되었던 너 따위야


절벅, 절벅. 땅에서 빗물이 밟힐 때마다 하늘 위에선 소나기가 되돌아 흐르듯이 거세게 내렸다.

그렇게 몰아치는 빗줄기마냥 머릿속에선 찰나의 세상들이 끊임없이 사라졌다 다시 생겨났다. 

현실이 될 수 있었던 세상들, 현실이 되어야 했던 누군가.


화살이 빗나가지 않아 죽거나 다칠 수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계속해서 아우성쳤다. 

아직도 모르겠냐고, 지금 너와 같이 달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뒤에서 끝내 꼬치처럼 꿰여 다치고 죽어버린 우리들이 진짜라고

현실을 부정하지 말고 어서 눈을 똑바로 보라고. 당장 고개를 돌려 달라고. 

여기로 와서 구해달라고. 지금이라도, 어서 지금이라도


어쩌면 그녀 대신 아만 사제님과 함께 왔을 다른 누군가도 계속해서 오열했다. 

왜 너 같은 가짜가 있느냐고. 

어째서 왕의 기사님이 아닌 너 따위가 그곳에서 달리고 있느냐고. 

그 곳에 있어선 안될 운명 주제에 어서 그 자리에서 나와달라고. 

빨리 내가 갈 수 있게 해달라고, 나를 그 곳에 들여달라고.


저 뒤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홀로 계신 아만 사제님을 위해  

당장 그 곳에서 없어져달라고.


지금이라도 뒤로 달려버릴 것만 같았다. 

저 곳으로 멈추지 않고 날아서 저 분들이 계신 곳으로. 

지금이라도 올바른 대로


“…놔줘요”

울음섞인 목소리에 세리아는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절벽 끝까지 몰려온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막막함에 덜덜 떨기만 하고 있었다. 

정신을 마저 차리고 나니 그제서야 손이 잡힌 채 자신을 노려보는 아이가 보였다. 

멍하니 손을 놓아주자 아이는 그저 멍하니 잡혀있던 팔로 눈물을 훔치기만 했다.


차마 그 모습을 보지 못하고 시선을 앞으로 향하니 

절벽 저 너머에서 무사히 도망쳐 오는 모든 사람들이 보였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건넬 수 없었다.

그건 곧바로 닥쳐올 사제들에 맞서 정신을 조금이라도 바로 세우려는 번듯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자리의 모두가 끝내 온전히는 보아내지 못한, 곧 닥칠 파멸 때문도 아니었다. 


#2.5

어린 시절 우연처럼 다가온 사제가 되면 좋을 것 같다는 말에 빛을 보았던 여자아이는 하루 빨리 사제가 되고 싶었다. 

철없던 소녀였던 때에 얼마나 몰래 부끄럽고 치기 어린 기도를 많이 했던가. 


저 하늘의 빛에, 많은 사람들에 닿게 해달라고. 

그 기도의 끝에 나풀거리는 사제복을 처음으로 입었던 날 얼마나 감격으로 가슴이 벅찼던가. 

시간 흘러 빛의 길을 따르고자 세이크리아로 떠나던 첫 날에는 둥실 떠올라 구름 위로 날아갈 것처럼 얼마나 두근거렸던가. 

그런데도 발걸음은 계속 쉽사리 떨어지지 않아 무거웠다.


갓 어른이 된 소녀사제는 하루, 또 하루 걸으며 조금씩 떠올렸다. 

그 떨어지지 않던 발걸음이 왜 그리도 무거웠는지. 

길을 걸으면 걸을 수록, 어딘가에 도착하면 할수록 빛의 성당 라사모아는 계속 멀어지기만 했다. 

그토록 가고 싶었던 세이크리아는 아직 도착하지도 못했는데도 그녀가 정말로 봐야 할 것들이 온 사방에 넘치도록 많았다. 

사람들도, 따라야 할 빛의 길도, 해야 할 일들도, 너무 많아 숨이 가쁘고 어지러웠다. 

정신없이 몰아쳤다.


그런 그녀의 앞에 어느 날 황금을 머리카락에 담은 듯한 사제님이 나타났다. 

말은 없어도 다정하고 친절한 루테란 왕의 기사님도 있었다. 

마치 저녁 하늘에 쏘아진 불꽃놀이처럼, 그 분들과 함께하는 여행이 다시 시작되었다.


어째서였을까. 지금까지와 비교도 안되게 위험한 악마들과의 전쟁인데도 옛날처럼 모든게 숨가쁘다는 생각이 안들었다. 

이제 약간은 더 어른이 된 듯이 그녀의 발걸음은 예전보다 훨씬 상쾌해졌다. 


함께 걸으면 걸을 수록, 어딘가에 도착하면 할수록 빛의 성당 라사모아 대신 새로운 길이 보였다. 

그토록 가고 싶었던 세이크리아는 이제 더 이상 그녀의 빛의 길이 아니게 되었다. 

악마가, 피가, 전쟁의 비명이 온 사방에 진동하는 이 풍경들에서 그 빛의 요람으로 다시 갈 수는 없었다. 


바라건대 부디, 이만한 일이라도 할 수 있기를...오직 그것만을 바랬다.

 

설령 왕의 기사님처럼 악마들과 칼을 맞대거나

새벽처럼 푸른 망토를 입은 그 분처럼 악마들의 손발톱을 막아줄 수는 없어도 

최소한…최소한…그 분들이 안 계신 마지막 순간에 작은 역할이라도 할 수 있기를.


그게, 한 때 세리아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어떤 사제의 인생이자 기억, 그리고 부질없는 꿈이었다.

“신을 능멸한 자 도망칠 수 없다! 순순히 빛의 구원을 받아들여라!”


#3

그 날도 세상에선 사람들이 소리 내며 떠들었다.

왁자지껄 떠드는 사람들이 술잔을 부딪치는 소리나 낮잠 자는 누군가의 요란한 뒤척임, 

아니면 거리에서 연주되는 여러 악기들의 선율이나 어딘가의 밭에서 갈리는 쟁기소리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새로 개발한 마법이 폭주해서 울리는 굉음이 요란히 터지는 곳들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아무 특별할 것 없는 하루였다.

이상하게도 하늘이 울부짖는 것처럼 사납게 비 내리는 어느 영지의 절벽에서, 끝내 번개처럼 내리치듯 나타난 어떤 집행관의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집행하라!”

하늘에 가득한 먹구름이, 마치 이 절벽을 세상에서 갈라놓은 것처럼 아득했다. 

속절없이 외딴 섬처럼 세상에서 떨어져나간 이곳엔 비와 번개, 그리고 단 한 명의 집행관과 그의 부하들만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신의 뜻을 실현할 뿐이다!”

오로지 그의 목소리만이 있었다. 강박적으로, 아니면 미친듯이 다른 목소리는 있을 수 없었다. 

사교도가 아니라는 택도 없는 애원이며 부디 제 말을 들어달라는 헛된 간청, 그리고 끝내 그 곳에 다다른 한 사제의 목소리까지도.

마치 그런 게 있었냐는 듯 감쪽같이 없어졌다. 

번개에 태워진 듯 사라졌다. 지워야 할 얼룩이니 한 점 남겨내지 않고 씻어주겠다는 양 휩쓸렸다.


“심판하라!”

그리고 그의 짧은 한 마디만으로 지금껏 조용했던 외딴 절벽에 온갖 새로운 소리들이 정신없이 밀어닥쳤다.


먼저 부하들이 움직였다. 

길다면 긴 몰이가 끝나고서 시작된 심판의 순간, 그들은 무대 뒤에서 하릴없이 기다리다 겨우 노래하는 합창단처럼 망설임 없이 활을 당겼다  

더는 허공이며 땅으로 빗나가는 일 없이 새들의 날개소리처럼 쏘아진 화살들은 사냥감들의 몸에 사정없이 박혀 들었다.


“멈추십시오!”

지팡이를 든 사제가 소리치며 달렸을 때는 이미 이 광기의 피날레를 맺을 비명과 몸부림의 화음이 절벽 한가운데를 끔찍하게 울려 채우고 있었다.


너무 갑자기 다가온 죽음에 비명도 지를 수 없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정신없이 손을 모은 채 기도문만 외우는 사람들이나, 화살을 막아주려 제 몸을 내던진 사람도 있었다. 

조금이라도 등을 넓게 펴 화살이 닿지 않게, 쓰러지지 않고 오래 서 있을 수 있게, 

무너지지 않고 꼿꼿이 버틸 수 있게,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 대신 웃는 표정을 보여줄 수 있게, 

그러다 저도 모르게 의식조차 가물해져 한순간에 스러져버리기 전까지. 


하지만 정작 그 몸에 감싸인 채로 한 거라고는 묶인 듯 못박혀 성내고 소리지르는 것뿐이었다.

내 앞에서 비키라고, 나를 지키지 말아달라고, 제발 이러지 말라고, 어서 비키라고. 지키지 말아달라고 

다급히 풀려다 끝내 종잡을 수 없이 엉켜버린 털실뭉치처럼 말도 되지 못한 악을 쓰다가…

겨우 날아온 화살들에 묶인 줄이 풀린 듯 제 앞에서 쓰러지는 몸을 안아보려 힘없이 퍼덕였다 

그러다 실 끊어진 인형 마냥 춤이라도 추듯 조금씩 뒷걸음질쳤다. 보이지 않는 무대 밖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렇게 한 명 또 한 명 베여진 장작나무마냥 넘어갔다

처음엔 날아드는 화살이 무서워서...다음엔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이 안 믿겨서. 끝내는 제 몸에서 피가 솟구치는지도 모르는 채로 허물어졌다.


뜀박질 몇 번이면 끝날 순간에 이미 지옥도는 거의 다 그려져 있었다. 

뒤늦게 달려온 금빛 머리카락의 사제가 간신히 그 아비규환 앞으로 달려와 방어벽을 펼쳤을 때엔, 

이미 사지육신만 운 좋게 멀쩡한 채로 실성한 듯 기도하는 두 세명과…

딱 목숨줄만 약간 더 붙은 채 찢어질 것마냥 벌어지는 입 밖으로 부글거리는 숨과 거품을 내뱉는 사람들 만이 남아있었다. 

그게 아니면 죽음, 죽음, 죽음 뿐이었다. 


온 사방에 널브러진 죽음들 사이에서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온 몸에 쥐가 난 듯 뻣뻣히 경련하는 그들의 피 흘리는 팔다리를 주물러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한 때 사제였던 한 젊은 여자의 생명도 그렇게 꺼져가고 있었다.


#3.5

그 어렸던 여자아이는 왜 사제가 되면 좋을 것 같다는 잘못된 말을 들었던 걸까. 

그저 포근하기만 한 요람 안에서 하루 빨리 사제가 되고 싶다고.

저 하늘의 빛에, 많은 사람들에 닿고 싶다고 철없는 기도나 하던 아이에게.


누군가는 눈뜨려 했다. 

마치 깊은 땅속에라도 묻혀버린 듯 잠들지도 깨어나지도 못한 채 끼어버린 듯한 여기가 너무 싫어서, 

눈을 뜨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서, 어떻게든 깨어나려 안달했다. 

그게 이제 곧 꺼져버릴 목숨줄을 붙들려는 헛된 손짓인줄도 모른채로 쉼없이 버둥거렸다.


더 이상 빛의 성당 라사모아는 없었다. 그토록 가고 싶었던 세이크리아도 없었다. 

어째서, 그녀가 신을 능멸했기 때문에? 

눈 앞의 놓인 빛의 길을 제대로 걷는것조차 힘들어했으면서 다른 이들의 손길에 홀려 눈 앞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가려 했으며 

끝내는 제 안의 빛조차 의심한 그 모든 것이 능멸이었기에 

이렇게 빛의 구원을 받아야 했던 걸까.


누군가는 눈을 떴다. 그랬다고 생각했다. 천장이며 풍경 같은 게 어렴풋이 보였다. 

그런데 눈을 뜨고 있는게 너무 힘들었다. 

주변도 온통 뭔지 몰랐다. 그게 너무 싫었다. 

아니었다. 이 곳은 현실이 아니었다. 다시 깨야 했다. 

그게 통칭 주마등, 죽어가는 사람의 인생이며 꿈, 기억이 썰물처럼 쓸려가는 잔상인것도 모른채 허망히 뒤척였다.


부디, 이 정도 일이라도 할 수 있기를...오직 그것만을 바랬다. 

벌떼처럼 달려드는 화살들 앞에서도 기도를 멈추지 않던,  제 몸을 아랑곳 않고 내던졌던 절벽 위의 사람들처럼. 

최소한...최소한, 마지막 순간에 작은 역할이라도 할 수 있기를.


하지만 결국 그만한 일 하나도 하지 못하고 끝난. 그게 황금처럼 내리쬐는 사제님도, 위대한 왕의 기사님도 없이 홀로 남은 

그녀의 보잘 것 없는 모습이었다. 

제가 지켜야 할 사람만으로 벅차 구원만을 갈구하다 끝내 눈 앞의 사람들을 몇 번이고 화살속에 내버린 채 달리고 외면했던 비겁하고 자격없는 사제.


누군가는 울고 싶었다. 그저 고통스런 지금이 괴로워서가 아니라 왜 눈을 떠야 하는지 모르겠는게 너무 슬퍼서 알고 싶었다. 알아야 했다. 

이 모든 걸 견디면서 계속 눈 감지 말아야 할 의미를, 이대로 죽지 않아야 할 이유를. 

조금만 더, 조금만 뭐라도 있었더라면. 

지난 세월동안 조금이라도 더. 왜 눈떠야 하는지 알려줄 뭐라도 내 안에 있었더라면.


#4

"아파요."

그 순간 누군가를 덮쳐온 건 명확한 무언가였다. 

형체도 없어 온통 뭔지도 모를 이 허상 속에서 그토록 갈망하던 것이었다. 

잡고 싶었다, 잡아야 했다. 미친듯 쫒았다. 쫒고 또 쫒았다. 

어느샌가 그게 목소리, 말이라는 걸 알았다. 

제게는 눈 말고도 다른 몸, 팔이며 다리 같은게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이번엔 그것들을 떠보려 했다. 뜰 수 없었다. 

더 필요했다. 원했다. 목소리가, 말이.


"...사제님."

조금만 더 빛이 있었더라면, 그렇게 기도했었다. 

지난 세월동안 조금이라도 더, 허망히 탓해왔었다. 

빛이 내 안에 있었더라면, 간절히 바래왔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갈구하는 건 오로지 단 하나뿐이었다. 


조금만 더 살아낼 수 있다면. 

지금 이순간만 조금이라도 더. 

이 목숨이 끊어지지 않을 힘이 내 안에 있어준다면.


한쪽 손가락에 자신을 모두 실었다. 현세로 돌아가려 악착같이 버르적거렸다. 


이제 그녀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제가 걷는 길에 허덕이며 번민하고 지켜야 할 사람들을 내버린 채 외면하다가 끝내는 제 안의 빛까지 의심한 끝에 내버려진 비겁하고 보잘것없는 사제, 그게 자신이었다.

그럼에도 이 모든 고통스러운 지금을 견디면서 계속 눈 감지 말아야 할 이유를, 

끝내 눈 떠야 할 이유를 이젠 알고 있었다.


[전 아만 사제님처럼 되는게 꿈인걸요]

용기내어 했던 그 말에 겸연쩍게 웃으며 고개 돌리던 모습, 옆에서 새삼스럽지도 않다는 듯 말없이 피식대기만 하던 웃음까지도. 


왜 잊고 있었을까. 

그 순간부터...

아니, 평범한 줄만 알았던 어느 날 그 분들을 만났던 그 순간부터 자신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는데.

혼자일 수가 없었는데, 혼자여서는 안되었는데. 


새벽처럼 푸른 사제복의 뒤에서 홀로 잔인한 어둠과 싸워왔던 그 분, 

끝까지 저를 악마라 몰아대는 사람들의 빛 한 점조차 감히 의심하지 않고 달렸던 사제님.

마을을, 영지를, 나라를 구한 왕의 기사면서도 잔심부름 하나하나도 "이 정도"라 여기지 않았던 

말없어도 친절하고 다정했던 기사님.


모든 걸 버리고 모든 것에서 버려졌어도 절대 저버려선 안 될 그 분들의 믿음과 우정이 남아있었는데.



"아만...사제님."

그러니 부디 한번만 더, 이만한 일을 제가 할 수 있다 믿어주세요.

빛의 대성당 라사모아도 세이크리아도 아닌 이 절벽에서 저의 마지막 역할을 무사히 해낼 수 있게 도와주세요.

저 하늘의 빛이며 많은 사람들도 아닌 단 한명에게로 이 손이 닿을 수 있게 저를 잡아주세요.

지금 이 순간 당신을 부르며 울고 있는 저 아이를 조금이라도 감싸줄 수 있도록 당신에게로 이끌어주세요.

오직 이것만이, 제가 사제로서 눈떠야 할 이유입니다.




#End


그 날도 세상엔 해가 없었다.


어딘가의 누군가는 하루가 멀다하며 술만 퍼먹고 곯아떨어지느라 여념없었고

다른 누군가는 이제 곧 끝날 몇백년의 잠에 빠져있었으며 

국정을 돌보느라 정신없이 바쁘거나 대책없는 제자를 쪼아대느라 정신없는 누군가도 있었다.


아무도 알지 못할 이유로 자신을 찾아올 사람을 기다리고 있거나, 

헐레벌떡 다 늦은 참극의 한 곳으로 뛰어들고 있기도 했다.

  

아무 특별할 것 없는 하루였다.

그리고 이름도 없는 어느 절벽에서 눈 앞의 사제에게로 애처로이 손을 뻗는 한 아이나, 

바로 뒤에서 같이 쓰러져있는 다른 사제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아만...

한번이라도 당신을 이렇게 불러보고 싶었는데.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어요.

당신이...당신이 너무 좋아서...그래서...

 

 

사제님...

아이는 이제 괜찮은가요, 울지 않나요, 아프지 않나요. 

전 괜찮아요. 아프지 않아요

그러니까 울지 마세요. 절 위해 울지 마세요

 

조금이라도 되었을까요.

당신같은..되고 싶었던...

당신이 조금이라도 부끄러워하지 않을...자랑스러워 해줄 사제가...

저는...저는...


"심판하라!"


팬픽 시간 끝에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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